머릿속엔 온통 이런것만 ㅠ (2008년 다름슈타트. 작곡가 Brian Ferneyhough의 공개레슨중)
그래서 20대에서도 또 한번 후반으로 꺾여버린 나이가 되어서야 일반인(?)들을 만날 기회가 많아졌다. 이 때부터 본격적으로 음악을 전문적으로 배우지 않은 사람들과 음악이야기를 하는데에 익숙해졌지만, 그 이전에는 무척 당황스럽고 막막했었다. 대체 어디부터 설명을 해야 할지, 질문 하나라도 나오면 음악의 역사부터 미학적 성찰에 따르는 수많은 생각거리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면서 머리는 하얘지고 얼굴은 경직되는 상황이었으니..
지난 10여년간 지하철에서 우연찮게 음악이야기를 했던 몇 분들과의 대화를 떠올려봤다:
(모두 필자가 급하게 과제곡을 마무리 하느라 지하철에서 곡을 쓰다가 옆사람이 흥미를 가지면서 말을 걸게 된 케이스)
고등학생 때 지하철에서 만난 아주머니:
아..예^^;
그럼 피아노도 전공했겠네?
아.. 전 작곡 전공인데요, 입시때문에 피아노도 배우고 있어요.
그럼 혹시 쇼팽도 칠 줄 아나?
아, 네. 요즘 배우는 곡이에요. ㅎ
그래요? 쇼팽 녹턴 쳐봤어?
아, 녹턴은 쳐본거 없는데요..
그럼 판타지는 쳐봤어?
아..아뇨.
아줌마는 판타지 쳐봤는데^^
아..네~;; (이 즘에서 레슨숙제로 써야 할 곡을 반도 안썼지만 내려야 할 지하철 역은 다가오는 것을 느끼며 초조해 하고 있었음)
그리고 그 즉흥환상곡 있자나..그게 참 좋더라..
.
.
(이하 쇼팽의 피아노 세계에 대한 일장연설 지하철 10정거장 분량..
옛날에 피아노를 전공했던 분으로 추정됨)
대학생때 지하철에서 만난 아저씨:
네..
학생이 직접 그리고 있네?
네, 제가 작곡하는거에요^^(이때부터 다가올 후폭풍이 두려웠음)
아 그래? 허~ (약간 생각에 잠기심)
...
그런데 그.. 작곡가란거 말이에요..
네~
거 뭐냐 그.. 차이코프스킨가 그사람 이후엔 아무도 없지 않나?
(헉..) 아...^^;
그렇잖아~ 차이코프스키 죽고 나서 작곡가가 없잖어~
뭐...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그래도 20세기에도 많이 있어요^^
아니 그니까. 차이코프스키 지나고 누가 있냐고... 아무도 없는거 같은데?
(중략)
(어찌됐건 이 분 생각엔 차이코프스키가 지구 역사상 마지막 남은 작곡가였음...
R.I.P ㅠ)
마치 뉴턴 죽고나서 과학자가 누가 있었냐는 듯한 질문..
흠, 너무 비약이 심한가?
그래, 백배 양보해서: "스티븐 호킹말고 제대로 된 물리학자가 있긴 있냐?" 고 묻는다면..
천체물리학을 전공하는 지하철 탑승객은 질문을 던진 옆사람에게 뭐라고 대답을 할까?
그럼요, 많죠~ 라고 해도... 내가 모르니까 없는거다! 그네들은 유명하지 않으니 제대로 된 물리학자들이 아닌게야!라고 단정짓는다면?
음악이 만국 공통어기 때문에, 당연히 누구나 음악이야기를 마음껏 할 수는 있다. 하지만 음악에도 수많은 전문분야가 있는데, 지하철 몇 정거장 지날동안 가볍게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닌, 대략 한세기 분량의 현대음악사를 설명한다는게 어디 쉬운 일인가... 어느 분야건 간에 그 분야의 발전역사를 다룬다는것, (음악에서 발전이란 개념은 문제있지만 하여튼) 만만치 않을 텐데, 음악이라고 해서 전문성이 있는 분야가 있다는 점은 여느 학문과 다를 건 없다. 그런데 마치 음악이 배울 게 뭐가 있냐는 듯, 음대에선 대체 뭘 배우냐는 질문들을 숱하게 많이 들어왔다. 대략 난감하다. 배우면 배울수록 더 멀리 있는 지평선이 보이는 법인데...
차이코프스키가 지상 마지막 작곡가라고 굳게 믿으시는 분을 3분내로 설득해서 현대음악의 존재와 의미를 알려드리기 위해서는 무슨 말을 했어야할까? 아직도 의문이다...
사실 작곡가라는 것이, 클래식에 국한된 것이 아닌데... 그때 그 아저씨는 아마 "작곡가"란 것은 음악 교과서에 나오는 옛 사람들에 국한된 개념이 아니었을까... 그래도 음악의 아버지인 바하, 어머니인 헨델에 그치지 않고 무려 차이코프스키를 아셨던 걸 보면 열심히 공부하신 분일 것이다.
항상 벼락치기로 곡을 쓰느라 지하철에서 오선지를 펼치는 일이 비일비재 했기 때문에 이런 재미있는 대화들이 이따금씩 일어나곤 했지만, 학부 4학년 졸업연주를 앞뒀을 때 만났던 분이 나에겐 가장 감명깊었다.
기억을 더듬다가 그때 당시에 적어놨던 일기를 찾았다. 한때 유행했던 프리첼에 개설했던 커뮤니티에서 발췌:
어제 일이었다
내 곡을 연주하는 날...
막막한 심정으로 악보를 펴보고 있었다.
옆에 앉아있던 사람이 내 악보를 마구 들여다 본다.
신경안쓰고 계속 내 할일만 했다.
그사람이 말 건다.
편곡하시냐고 묻길래
내가 쓴 곡인데 오늘 연주할거라 그랬다.
그런식으로 긴 대화가 시작되었다.
사실 지하철에서 악보 펼치고 있으면 관심있게 쳐다보다가 말을 거는 사람이 간혹 있어왔고, 대부분 자신들의 음악적 소견의 편협함만을 소신있게 드러내며 나의 동의를 구하거나, 나를 무슨 별나라 사람인양 신기하게 쳐다보는 경우 중 하나였기에, 처음에는 예의에 어긋나지 않는 범위에서 최대한 건성으로 대답하며 대화의 맥을 끊으려 했으나...
이 사람은 뭔가 달랐다.
재즈를 공부하다가 성악에 입문하여 다음 달 이태리에 유학 갈 사람이었는데...
이야기를 들어봐도 그렇고, 나한테 질문하며 대답을 듣는 태도를 봤을때..
상당히 통하는 면이 있었다.
이야기는 어느덧 나의 진로에 대한 고민으로 바뀌고...
난 사실 작곡을 계속 해야할 지 모르겠고 정말 되도록이면 안하고 싶단 이야기를 했다.
그 사람은 내 이야기를 듣더니
나를 설득시키려 한다.
나를 만난 시간은 얼마 안되지만, 그 짧은 시간이나마 나를 파악한 바로는.. 나는 그 어느것보다도 작곡이 어울릴 사람이란다. 생각의 깊이나, 태도...성격 등에 있어서도.....
정말 성공적인 작곡가들중에도 자신은 작곡을 할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는 사람이 있단다...
작곡에 대해 회의를 하는 것은 당연하다. 내가 생각이 많아서 그런거다...
교대 역에서 헤어지면서
내 손이 아스러지도록 붙잡고
신신당부를 한다.
꼭~ 꼭! 반드시 작곡을 계속 하라고...
사실 그사람은 나와는 아무 관계 없는 생면부지인 사람인데
내가 작곡을 계속 하건 말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런데도...
나는 그분이 선물이라며 손에 쥐어준 립글로스를 어설프게 쥔 채
마치 전쟁터에 나가는 듯 아쉽고 결의에 찬 표정을 짓고
그럼 안녕! 하고 홀연히 사라진
그 사람의 뒷모습을
토끼눈을 하고 바라보았다.
이 사람은 정말 평생 잊지 않을 것 같다.
살다보면 재미있는 일이 많다.
그분, 돌이켜보면 정말 고마운 분이다. 지금은 어디에서 뭐 하시려나... 훌륭한 재즈 보컬리스트가 되어있을까? 궁금하다. 어떻게 보면 참 신기한 인연인데.. 다시 만나도 알아볼 수나 있을 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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