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음악이란 것은 대체 무슨 음악을 말하는가?"
(일단, 한국음악의 정체성에 관한 정확한 개념정의를 원하는 사람들을 위한 글 링크)
대학에 진학하면서 고등학교때 까지는 몰랐던 먹먹한 작곡가의 세계로 떠밀려 들어갔었다. 술과 담배로 덮혀있는 선배들의 심각한듯 하면서도 장난스러운 모습을 약간의 두려움을 가진 채 들여다보았더니 각자의 개성이 농후히 뭍어나는 사람들이 음악에 대한 토론, 교수님들의 강의모습 패러디, 신변잡기 및 음담패설로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나가고 있었다. 그리하여 학교, 집, 레슨 선생님 댁 만을 전전하던 내 고등학교 시절의 잔잔한 (물론 그때 당시에는 우여곡절이 많고 정신이 없다고 느끼기도 했지만..) 호수의 수면과 같은 마음상태에 이별을 고하고 온갖 변덕을 겪는 파도와 같은 심리가 되어갔다.
1학년 연주수업때 강석희 교수님이 한 말씀 하신 것이 기억난다. 다들 넓고 다양한 현실은 모른 채 자기들만의 좁을 세계안에서 뭔가 꿈을 꾸고 있는 듯 하다고.. (그러시더니 1시간 가까지 제자이신 작곡가 진은숙님에 대한 자랑에 빠지셨다)
돌이켜보면 맞는 말씀이다.
고등학교때 모짜르트와 브람스, 바하 등 서양 클래식 음악에 빠져서 들으며, 작곡 레슨 시간에 두도막 형식의 피아노 곡을 쓰고, (잘 할 수 있게 되면 세도막으로 넘어갔다. Olleh!) ‘나는 가볍게 통통 튀는 천재 모짜르트보다는 인간적인 고뇌와 고집스러움이 드러나는 베토벤이나 브람스 같은 작곡가처럼 곡을 쓰고싶다’고 생각하며 반복적으로 같은 악구를 재사용하던 시절.. 분명 나는 현실감각이 전혀 없이 꿈을 꾸고 있었다. 이 꿈은 대학입시를 치루고 입학을 코앞에 둔 채 지도교수님을 찾아갔을 때 찬물이 끼얹혀진다. 그때 당시만 해도 국내에서 성대하게 치뤄지던 범음악제 (Pan Music Festival)의 실황 음반들을 들려주시면서 이제부터는 입시준비를 위해 하던 것들을 그만두고 현대음악(?)을 써야 한다고 말씀을 해 주신 것이다.
당최 형식이고 구조고 알 수 없는 신기한 소리들을 들려주시면서 앞으로는 이런걸 써야 한다고 말씀하시니 백지와 같던 나의 음악세계에 대체 어느 붓과 놀림으로 첫 획을 그으란 말인가! 엄청나게 신기하면서도 막막함을 견딜 수 없는 상태로 일단 개발새발 곡을 쓰기 시작하면서 든 생각: 그래, 난 한국인이니까 한.국.음.악.을 써야 해!
그때부터 나의 한국음악 및 국가정체성에 대한 고뇌가 시작되었다. 예나 지금이나 주제에 관한 자료조사는 게으름으로 인해 늘 뒷전이고 혼자 머리속으로 온갖 궁상을 다 떠는 버릇은 항시 대기중이어서, 오로지 등하교 길(각각 2시간이었으니 시간은 충분했다)의 내 머리속에서만 한국음악의 미래에 대한 사색이 이루어졌다...
또래 작곡과 학생들 몇명에게 국악에 관심 있냐고 물어봤다가 코웃음과 함께 그런거 안한 다는 대답을 들었고, 답답함을 못 이기고 취중진담으로 강사급 선배님과의 술자리에서 “선배님은 곡을 쓰실 때 국가나 민족을 생각하시나요?”하고 들이댔다가 헤드락과 또 한번의 원샷을 강요받을 무렵, 그때 당시의 좁디 좁은 인맥으로는 이러한 고민을 교류 할 수 있는 마땅한 사람과 방법을 찾을 길이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웃어넘길 일이지만, 이 때 난 정말 답이 안나오는 현실이 너무 섭섭해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
2학년이 될 무렵, "차라리 국악작곡과에서 가르치는 강좌들을 듣는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듣게된 국악반주 수업.
장고를 쥐는 방법을 배우고, 황병기의 가야금 독주곡에 맟춰 어설프게 반주동작들을 따라하면서 '나는 누구인가...여기는 어딘가..'라는 생각을 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황병기는 가야금의 대가이자 국악을 현대음악의 범주로 끌어올릴 뻔 했던 위대한 작곡가이다. 하지만, 가야금으로 화음을 치고, 서구적인 곡 구조를 대입하는 등, 그닥 한국음악의 정체성에는 다가가지 못하는 느낌의 음악들이 많았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오히려, '아, 가야금으로도 화음을 탈 수 있구나!'하는 깨달음을 많은 음악인들에게 주며 국악기의 서양화를 도발하는 도화선이 되지 않았나 싶다. 그 때도 느꼈지만, 지금에 와서 더 도드라진 현상인 국악의 서양음악화와 그 후유증에 대해선 향후에 아주 긴 포스팅으로 자세히 논해야겠다 ㅠ
당최 맞물리지 않을 것 같은 국악과 (서양)현대음악의 미학과 작곡법들을 가지고 어설픈 고민짓을 하다가, 우연히 작곡법 시간에 들은 특강에서 해결의 실마리까진 아니더라도, 왜 내 고민들이 해결이 안되는 지 정도는 알게 되었다.
예술(Kunst)의 개념 자체가 서구의 것이기 때문이다.
19세기에 성립된 (비실용적, 다시말해 아무 쓰잘데기가 없는) 예술의 개념은 서양철학에서 비롯된 것이고, 한국의 미학(이 미학이라는 개념조차 유럽 것이지만 하튼)에 해당사항이 없는 담론이거나 내가 미처 공부하지 못한 부분인데, 굳이 같은 음악이랍시고 그들을 끼워맞추려는 발상자체가 근본적으로 틀린 접근방식 아닌가!
대학교 4학년 무렵. 나는 옛 국악 작품들을 연구하고 국악철학(?)을 공부하기 위해서 유학을 미루고 싶었으나..나의 고민을 털어놓은 몇 안되는 선생님과 선배들, 심지어 특강을 하셨던 분까지, 모두 만류를 하셨다. 일단 넓은 세상으로 나가서 더 배우고 하다보면 저절로 풀릴 문제들도 많다고 하셨다.
2006년, 독일에 놀러가서 아쟁을 연주하시는 작곡가 김남국 선생님을 다름슈타트 음악제에서 만났을 때, 느낀바가 많았다.
독일 작곡가 한스 젠더(Hans Zender)에게 사사한 이 분은 아쟁을 들고 유학을 가셨는데, 이 악기에 매료되어서 한스 젠더가 직접 아쟁을 이용한 작품을 작곡하고 연주를 부탁하신 것이다. 필자도 아쟁이라는 악기가 신기해서 몇달간 국악학원을 찾아가 직접 배우기도 했는데, 김남국 선생님 말씀대로 어디 산에라도 들어가 1년간 도닦듯이 무형문화재에게 사사라도 받고 싶었다. 그정도로 국악이 내 살과 피에 내제되어있지 않고 이론적으로만 터득한 악기에 대한 지식으로 곡을 쓴다면 한스 젠더와 같은 외국인 작곡가의 국악기 작품이랑 다를 바가 있을까?
이런식으로, 오히려 한국의 악기들이 유럽에서도 각광을 받기 시작했는데, 사실 일본이나 중국의 악기들 보다는 인지도가 많이 낮은 것이 현실이지만, 국악인들이 외국으로 많이 진출하고 한국 작곡가들이 더욱 국악기를잘 활용한 걸작들을 많이 쓰면 사람들의 시야도 넓어지고 한국문화의 위상도 높아지지 않을까?
내가 상상한 신한류에 대한 때이른 공상을 하며 오늘도 창밖 먼 산만 바라보았다... 쿵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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