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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이야기/칼럼

특이한 성적 취향을 실현시킨 현대음악 작곡가 게오르그 프리드리히 하스(Georg Friedrich Haas)와 그의 부인 몰레나 리 윌리엄스-하스

오스트리아 출신으로 현재 뉴욕 컬럼비아 대학 교수로 있는 세계적인 작곡가 게오르그 프리드리히 하스가 얼마전 결혼과 함께 성적 소수자로서 커밍아웃을 했는데, 그로 인한 창작세계의 변화와 삶의 변화를 다루고자 한다.


억압된 욕망이 분출되지 못하면 예술가는 이를 작품으로 승화시킨다고 한다. 과연 어느정도 사실일까? “승화”라고 정확하게 표현할 수는 없지만, 일부 예술가들은 자신의 고통을 작품을 통해 표현하는 것은 분명하다. 자신의 인생이 어디로 흐를지 몰랐던 반 고흐의 그림에 나오는 구불거리는 오솔길은 지평선 근처에 처참하게 끊겨있고, 판소리에 나오는 절절한 사연은, 그 구절을 읊은 것을 본따서 국악기로 산조의 형태로 가사가 없이 연주했을 때에도 가락에서 맺힌 한이 그대로 스며나온다. 흑인들이 부르던 블루스는 그 우울한 열정 때문에 많은 이의 심금을 올린다. 차이코프스키와 베토벤은 또 어떠한가? 그들이 고통이 없었다면 그들의 음악은 과연 지금과 같을까? 그렇다면, 예술가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은 인생에서 큰 고통을 겪어야만 하는가?




오늘 소개하고픈 오스트리아 태생 작곡가 게오르그 프리드리히 하스는 평생을 남모를 고통을 지니며 살아온 작곡가이다올해 62세인 그는 세 번의 결혼생활에서 결국 실현시키지 못한 자신의 그릇된(?) 성적 욕망을 억압하고 숨기면서 이를 어느 정도는 자신의 작품에 반영시켰고현실에서는 이를 이루지 못할거라 여기며 세번째 이혼 이후로는 오랜 세월을 독신으로 살아왔다실제 그의 작품은 극한의 미분음(피아노 건반에서 가장 작은 음정인 반음보다도 더 미세한 음정 그는 1/12음까지 사용했다)을 쓰거나듣기에도 고통스러운 음형의 고집스러운 반복이 들어가는가 하면정치적 색체를 진하게 띄는 작품과 어둠속에서 연주해야 하는 작품을 포함해 연주자가 숨막히도록 어려워 하고 그들의 마음을 힘들게 하는 등 지극히 가학적이고 고통스러운 작품들이 줄을 이었다.


관련글: 2013/03/26 - 작곡가 하스의 멘붕 조율 곡들


그런데, 작년 가을에 우연히 인터넷 데이트 사이트(OK Cupid)에서 만난 몰레나 리 윌리엄스(Mollena Lee Williams)와 결혼하면서 이 상황이 바뀌었다.[각주:1]

(google image)


작곡가 하스의 성 정체성을 알기 위해서는 배우자인 윌리엄스에 대해 아는 것이 필요한데 이 분의 정체는 더욱 수수께기만 같다. 흑인 여자이면서, 성적 소수자 커뮤니티에서 여러 활동을 하며 인권운동가에 가까운 유명세를 안고 있는 BDSM 활동가이다. BDSMbondage(속박), discipline(훈육), dominance(지배), submission(복종), sadomasochism(가학/피학성) 등의 단어들을 통합한 약자이다. 이 단어들을 전부 포함하는 BDSM의 일반적인 의미는 둘이 합의하에 가학적이고 불평등한 역할놀이를 하는 사람들의 성 정체성이다(이들 커뮤니티는 더 나아가 일반적이지 않은 성적 취향을 지닌 성 소수자를 모두 포괄하려 하기도 하지만, 더 구체적인 언급은 이 글에선 하지 않도록 한다). 작곡가 하스의 배우자인 몰레나 리 윌리엄스-하스(Williams-Haas는 결혼 이후 바꾼 이름)는 복종과 피학성(마조히즘)을 쾌락의 수단으로 삼으며 자신을 흑인 여성 노예로 설정하고 역할놀이를 하는 것에서 기쁨을 느끼는 전형적인 마조히스트이다. 특이한 점은 자신이 흑인 여성이어서 이 역할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적인 하나의 인간으로서 자신의 (노예이길 바라는)성 정체성을 당당하게 드러냄으로 인해 자신의 인권을 지킨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오히려 자신이 흑인이기 때문에 흑인노예의 역할을 하는 것에 제약을 받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인종차별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몰레나 리 윌리엄스가 작곡가 게오르그 프리드리히 하스를 만난 것은 “노예”인 자신이 마음껏 섬길 수 있는 주인을 만났다는 뜻이고, 게오르그 프리드리히 하스는 바로 가학적인 역할을 즐기는 사디스트이자 지배자인 것이다.


환갑이 넘은 나이에 비로소 자신에게 맞는 삶의 동반자를 만난 하스는 그 해 부터 창작열이 마구 불타올랐다. 그동안 작곡을 심리적 욕구 해소의 도구로 사용해왔다면, 이제는 영적인 행위(spiritual activity)에 가까우며 이것이 작곡과정에 훨씬 수월하고 고차원적이라고 작곡가 하스는 밝힌다. 연주자가 어려운 곡을 연주하느라 고군분투하는 그 과정에서의 긴장된 에너지와 음악 자체에서 분출되는 순수한 에너지 사이에서 비교를 하자면 과거에는 전자에 해당되는 작품이 많았다면 이제는 후자가 더 작곡가 본인이 추구하는 것이 되었다. 그리고 더이상은 정치적인 곡을 쓰지 않기로 결심 하였으며, 후배 작곡가들에게 자신의 욕구와 정체성을 숨기지 말 것을 충고한다.[각주:2]


작곡가인 필자도 이 점이 매우 흥미롭다. 사실 곡을 쓰는 과정에서는 개인적으로 느낄 수 있는 고통(개인적으로는 고독감)을 극한으로 느꼈을 때 비로소 소통의 욕구와 함께 영감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작곡의 과정을 심리치유와 같은 역할로 여기며, (사실은 곡을 써야 하는 현실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서 힘든 것이었으니, 병주고 약주는 것인지도 모를 애매한 상황에서) 눈물젖은 오선지에 콩나물을 그려가며 커피로 밤을 지새우기 때문이다. 이런 방식이 건강에는 매우 좋지 않지만, 한편으로는 일상생활에서 겪기 힘든 차원의 희열과 해방감을 느끼기도 하고, 현실에서 실현시키기 힘든 극단적인 가학성이 곡에 스며들기도 하는데 이 점은 개인적으로 하스의 옛 작곡 경향과 어느정도는 일치하는 듯 하다


그렇다면 나의 억압된 욕구가 무엇인지 찾아서 해소를 한다면 작곡가 하스처럼 창작열이 더욱 불타오를까? 현실이 만족스러우면(고독감을 느끼지 않으면) 오히려 작곡에 어려움이 생길까봐 막연히 두려웠는데, 하스의 경우를 보면 그렇게 걱정할 일은 아닌 듯 하다. 그러고 보니 필자도 작년에 결혼하고 아이까지 낳고 키우고 있는 현재, 곡을 쓰는 일은 육아와 일을 병행해야 하는 현실적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아직 가능한 일이긴 하고, 아직도 작곡은 개인적으로 재미있고 신나는 지적 ‘놀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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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원고는 바그네리안 김원철의 음악이야기에서 접한 소식에서 소재로 삼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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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 서울 글 link

  1. http://www.nytimes.com/2016/02/24/arts/music/a-composer-and-his-wife-creativity-through-kink.html?_r=0 [본문으로]
  2. An Interview with Georg Friedrich Haas BY JEFFREY ARLO BROWN · COVER-PHOTOGRAPHY SUBSTANTIA JONES · DATE 02/04/2016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