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동시에 두 곡을 마무리 짓느라 미치고 펄쩍 뛸 노릇이지만, 요즘처럼 정치에 관심이 간 적도 없는 것 같습니다. 현 정부에 어차피 기대도 별로 안했지만, "상상하라 그 이하를 보여줄 것이니"라는 문구가 무색하게 입이 쩍 벌어질 일들이 연속되니... 아마도 제 저희 나이대(가 몇살인지는 비밀)에서는 이번에는 정말 투표로 민심을 보여줘야 한다는 결심이 어느정도는 보편적인 현상이었으면 좋겠습니다.
2. 순수예술 vs. 표제(?)음악?
이전에 곡을 쓸때는, 다른 유명한 현대 작곡가들이 어떻게 음 소재를 고르고 그것을 조직화하고 체계화 시키는지, (그리고 그 중에 따라할 만한 것이 무엇인지...쿨럭) 그런 테크니컬한 요소들이 가장 주된 관심사였고, 정치, 또는 사회적인 이슈를 작품의 제목이나 소재로 사용하는 것에 -순수음악의 추상성에 손상이 간다는 이유로- 극도의 거부감을 느끼곤 해왔습니다. 그런데, 공부에서 어느 정도 손을 놓고 사회생활과 잉여짓을 병행하며 혼자만의 공간에서 곡을 쓰다 보니 이제는 주변 돌아가는 일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 할 뿐만 아니라, 나와 먼 곳에서 벌어지는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가 않다보니 감정적으로 반응하게 되는데, 제가 쓰는 음악에 어쩔 수 없이 제 감정상태를 담게 되다보니 결국 곡의 주제 자체가 거의 오늘날의 현실에 대한 저의 반응이 되어가고 있는 듯 합니다. 그러다보니 학구적인 자세로서의 음을 다루는 기술보다는 그것을 가지고 무엇을 말을 할 것인지가 더 관건이 되어가는 중입니다. 게다가, 이런 격렬한 감정과 공익을 추구하는 정의감은 작품을 생산하는데 큰 동기부여의 요소가 되어가게 됩니다.
최근에 작곡한 거문고와 현악앙상블을 위한 작품<Elegy for Elleji>에는 생명의 가치에 대한 제 나름대로의 성찰을 담았는데, 앙상블이더라도 각자 악기들이 한번씩은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기회를 주면서 곡이 진행됩니다. 이 때 각 악기들이 시간차를 두고 소리내는 멜로디를 모두 다르게 해서 모든 생명의 개별성(individuality)에 대한 표현을 하고자 했습니다. 사실 이렇게 하면 곡의 통일성에 지장을 주게 되고 자칫하면 메들리처럼 정리되지 않은 구성을 낳기 때문에 조심스러웠고, 한 음 한 음 신중하게 선택하다 보니 음이 별로 없게 되었습니다. (휴...언제는 곡 쓰면서 음이 많았더냐... 콩나물 게을리 키우는 이유도 참 다양하군 ㅡㅡ)
3. 예술인의 정치발언
얼마 전에는 예술인 80여명이 서울시 교육감 후보 조희연을 지지하는 선언을 공개했다는 소식(기사 링크)이 저는 매우 반가웠습니다. 예술가는 작품으로 소통을 해야 하는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평상적으로 쓰이는 언어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것을 억지로 자제할 필요 또한 없기 때문입니다. 직업예술가의 역할 중 하나는 현실세계를 한발자국 떨어져서 바라보며 그 현실에 자신이 가진 매개체로 어떤 식으로든 반응을 하고 그것을 일하느라 바빠서 세상을 관조적인 시각으로 바라볼 여유가 없는 비예술인에게 제공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유를 거친 그 생각을 예술매체가 아닌 일반 언어로 표현하는 것도 오늘날 사회를 바라보는 데에 도움이 되는 매우 유용한 자료라고 생각되기 때문이지요.
4. 예술가는 진보여야 하는 이유
여기서 지칭하는 "예술가"는 '순수 직업예술가'로 범위를 좁히겠습니다. 클래식 현대음악 작곡가는 모두 포함되네요. 적어도 자신의 주된 업을 예술활동, 특히 창작활동으로 삼으며 그 예술이 상업성을 추구하지 않는다면 그 예술이 나아가야 할 역사적인 방향성에 대해서 어느정도는 고찰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진보주의적인 생각의 틀과 거의 일치하며, 이런 생각을 머금은 채로 사회를 바라봤을 때에는 당연히 그 사회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성찰을 자연스럽게 하게 되며, 절대 다수가 만족하는 사회일지라도 그 이면의 어둠과 부족한 면, 유토피아에 반하는 현상 등을 예리하게 포착하게 됩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100% 순수한 순수음악을 추구할 수도 있겠지만, 작곡가가 일생동안 순수음악만을 추구했다는 현상 그 자체로만도 어느정도 그 사회에 대해 말해주는게 있지 않을까 싶네요...
이에 대한 더 자세한 주장이 밝혀진 글로 <원래 예술은 좌파다(부정변증법 블로그)>가 있습니다.
황지우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을 경질시키는 것이 조직적인 음모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그것을 물론 음모가 아니라 거사라고 하겠지. 그런데 그러는 그들의 관점이 너무도 무지하기 짝이없다. 일단 인용을 좀 해 보겠다. "문화부와 문화계 보수성향 단체와 인터넷 매체들은 한예종 개혁을 명분으로 일사불란한 행보를 보여주고 있다. 문화미래포럼(대표 정진수 성균관대 교수)은 지난해 9월 심포지엄을 열어 전문 예술인 양성이란 설립 취지에서 벗어난 한예종의 조직 축소와 구조개혁을 요구하고 지난 3월 <독립신문> 등의 인터넷 매체 등에서 통섭 사업에 대해 집중적으로 의혹을 제기했으며, 그런 내용이 감사의 지적사항으로 고스란히 되풀이 됐다." 여기서 전문예술인 이라는 말에 주목해 보자. 지금 보수성향 단체들이 한예종에 계속해서 딴지와 억압을 가하는 것은 전문 예술인 양성을 넘어 그 이상을 양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문예술인의 너머라! 간단히 말하면 좌파예술인을 양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좌파예술인의 반대말로 교묘하게도 우파예술인이 아니라 전문예술인이라는 말을 배치해 넣었다. 여기서 마르쿠제의 1차원성 테제를 들먹이지 않을 수 없다. 마르쿠제는 20세기 후반 선진 자본주의 사회가 이미 노골적인 계급지배와 착취가 아니라 삶 차원에 스며든 문화적인 지배로 들어섰음을 지적했다. 즉, 노동자들, 피지배계급들을 강제력으로 억압하는 대신 그들이 애초에 현 체제 너머를 생각하지도 않게 만듦으로써 사실상 자발적인 복종을 끌어낸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자율적으로 살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함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체제에 봉사하게 된다. 이렇게 체제 너머를 상상도 하지 못하게 된 인간이 "1차원적 인간"이다. 이런 1차원성은 너머를 사유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 세 활동을 왜곡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첫째는 철학이다. 실제로 19세기까지 철학은 엄밀한 학이 아니었다. 그리고 엄밀한 학이 아니었기에 그 속에는 유토피아가 들어있었다. 철학은 "~이다."의 학일뿐 아니라 "~이라야 한다"의 학이기도 했으며, 논증의 학일뿐 아니라 상상과 직관의 학이기도 했다. 얼마전 대표적인 좌파 논객인 조정환씨가 "결국 우리는 직관을 통해 알수 밖에 없다."라고 말했다고 해서 다른 좌파논객들이 마구 비웃는 경우가 있었는데, 직관과 상상을 철학에서, 학문에서 배제하는 관점이야말로 철학의 1차원화의 핵심이다. 오늘날 철학과 과학은 거의 존재하는 것을 확증하는 역할로 위축되어 있다. 둘째는 정치다. 정치 역시 그 속에 유토피아적 열망이 표출되는 활동이지만, 근대 국가의 정교한 대의제 장치는 교묘하게 직접적인 참여를 봉쇄하고, 참여에의 의지도 봉쇄한다. 그나마 투표나 하면 다행인 소극적이고 순응적인 국민들이 만들어진다. 자신이 가진 권력을 행사하는 능동적 행위인 정치가 단지 대의제 대표를 선출하는 투표 정도로 축소되고 수동화 된다. 셋째는 예술이다. 예술이야 말로 일체의 논증의 단계, 정당화의 단계를 건너뛰고 바로 상상력만으로 유토피아를 그려내는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다. 예술은 현실에 대한 "절대적인 거절"의 의미를 담고 있다. 18세기 고전주의 음악이 정치색이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보수적이지 않은 것은 그 음악들이 최고의 조화와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며, 이는 바로 현실에 그러한 경지를 요구하는 강력한 추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만약 이상적인 사회가 된다면 그런 조화와 아름다움은 예술이 아니라 노동을 통해 표현될 것이다. 따라서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예술은 항상 지배자에게 걸리적 거리는 존재가 된다. 따라서 지배계급은 예술을 이상적인 아름다움에의 끝없는 추구 대신 지금 당장 주어지는 "즐거움"에 한정지음으로써 너머를 상상하는 힘을 박탈한다. 이렇게 예술은 오락이 된다. 이 세가지는 이미 이 정권에 의해 끊임없이 강조되고 있다. 당장 결실이 나오지 않는 학문, 인문학들에 대한 경멸과 경제, 경영학, 공학 우선주의, 모든 정치 활동의 대의제 기구 내로의 축소 시도, 그리고 마침내 "전문예술인"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는 예술의 기능화와 오락화. 각종 예술단체들의 실적을 흥행실적으로 환원시켜버리면서 대중들에게 상품을 판매하라는 압박. 이 속에서 지금에 대한 거부, 그리고 더 나은 어떤 세상에 대한 상상력의 발동이라는 예술 본연의 활동을 하려는 사람들의 축출. 이 모든 것이 바로 한예종 말살 작전에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착각하고 있다. 사람들이 어떤 작품에 열광하는 것은, 즉 흥행이 되는 것은 그 속에서 현실에 대한 거부와 그들에게 호소할수 있는 더 나은 어떤 경지, 삶, 세상에 대한 동경이 있기 때문이다. 즉 예술작품과 현실이 갈등을 일으키기 때문에 그 긴장감을 느끼기 위해 몰려드는 것이다. 현실에 대한 뻔뻔한 미화, 단지 기능으로 축소된 즐거운 자극의 연속으로 이루어진 작품은 결코 감식가들은 물론 대중들에게도 어필하지 못한다. 그러니 예술작품은 그것이 예술작품이려고 하는 한 좌빨일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정치적으로 분명 보수우파의 입장을 밝혔던 발작, 보들레르, 토마스만의 작품을이 도리어 좌빨들에게 끊임없이 영감을 주고 인용되는 것이다. 반면 소비에트나 동독 공산당의 명령에 따라 인민들에게 값싼 오락물을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이라는 미명하에 풀빵처럼 뽑아 내었던 소위 좌빨 예술가들은 아직도 그 시절에 향수를 느끼는 일부 좌파 지식인들의 오덕후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듣보잡으로 남아있는 것이다. 만약 사회주의 국가의 예술가들이 사회주의를 비판하고 그 억압을 넘어서는 작품을 남겼다면 그것은 힘을 얻게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쇼스타코비치 같은 작곡가의 작품이 동시대 소련의 수많은 소위 혁명적 음악가의 작품과 달리 여전히 광채를 띠는 것은 그가 결코 사회주의자가 아니었음을 반증한다. 아마 그가 서독이나 미국에서 태어났다면 사회주의자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즉 위대한 예술가는 반골인 것이다. 현실에 대한 절대적인 거절. 그것은 예술의 다른 이름이다. 만약 현실에 순응하는 혹은 그런거 신경쓰지 않고 단지 기능의 전문화에만 신경쓰는 그런 예술을 요구한다면 그것은 예술에게 더 이상 예술이 되지 말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파들이 그토록 숭상하는 시장이 더 빨리 감지한다. 미드만 보더라도 공화당 코드의 미드는 거의 실패한다. 미국에서 가장 보수적인 기업인 폭스가 가장 진보적인 애니메이션인 심슨가족을 계속 방영하는 이유도 여기 있는 것이다. 그러니 예술가들에게 억지로 좌빨이 되라고도 혹은 좌빨이 되지 마라고도 요구하지 말라. 한마디로 예술가들에게 거부, 거절을 하지 말라고 요구하지 말라."
4-1. 도대체 왜 "종북좌파"라는 말이 2014년이 되도록 파다하게 떠도는지 모르겠는데, "종북"이 "좌파"인 경우가 역사적으로 있었다 한들 이 둘이 상관관계가 100퍼센트 있지 않다면 종북이 반드시 좌파가 아닐수도 있다는 생각을 지니고 이 둘을 따로 취급해야 한다고 봄. 솔까 북한에 관심 한방울도 없어도 좌파일 수 있지 않겠음? 상식적으로...
4-2. "진보"가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경제적인 발전에 국한되지 않고, 민주적이고 인권과 다양성을 존중하는 측면에서 총제적으로 더욱 발전된 선진사회를 추구하는 것을 뜻한다면, 지금 이 시국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진보를 추구해야 하지 않을까? "종북"이나 심지어 "좌파"도 아닌 "진보"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