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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이야기/추억

내 생애 첫 위촉곡


작곡을 전공하다가 일개 학생신분에서 벗어나 작곡가로서 거듭나는 과정으로는 누군가에게 작품을 위촉받아 자신의 창작의 댓가를 금전적으로 받는 일이 생기는 것이 포함되지 않을까?

오랜 세월동안 막연히 동경만 하던 일이 나에게도 드디어 이루어졌었다.

사연을 이야기 하자면 좀 길다...


때는 2004년 여름.  오스트리아로 유학 온지 1년이 되어갈 때였다.

열심히 하겠다는 결심으로 온갖 희한한 과목들로 시간표를 꽉꽉 채워왔던 지난 두 학기...
덕분에 되려 작곡에 소홀하게 되고 지도교수님이 약간 기분이 언짢으신 듯 했기 때문에 꾸역꾸역 현악 사중주 곡도 완성해서 콩쿨에 내고.. 청소하고 요리하고 빨래도 하고..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렇게 첫 1년을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하얗게 불태우고 지칠대로 지쳐 슬럼프가 찾아왔던 여름방학.
수업이 없으니 제대로 된 곡을 써야 했지만, 집주인의 시집살이(?)를 못견디고 기어이 이사를 가는 등, 각종 딴짓에 여념이 없었던데다, 원하던 여행도 제대로 하고 싶었던 걸 보니 어지간히 곡이 쓰기 싫긴 했나보다.  

꿈에 그리던 이웃나라 스위스를 일주일에 걸쳐 다녀오던 길, 동선을 어이없이 비효율적으로 잡은 나는 스위스 서쪽 끝에서 바로 잘쯔부르크까지 하루만에 집으로 올 예정으로 일찌감치 기차에 올랐었다. 베른에서 라우터브운넨까진 무사히 왔는데, 그 이후에 기차가 느릿느릿 거북이걸음을 하더니 취리히에 다 와서 제대로 문제가 생겼다....고 추측만 할 뿐 불어는 커녕 엄청난 억양의 스위스독일어도 알아들을 수 없는 난 대략 패닉상태.  

옆자리에 앉아있던 청년이 오스트리아 사투리로 승무원에게 이것저것 물어본다.  '오옷..이건 들린다!'  귀를 있는대로 쫑긋 세우며 경청했다.  아마도 오늘 자정즘에 취리히까진 가더라도 그 이후엔 기차들이 올스톱일 거라는... !@#$% 

국제미아가 되는 것인가...

승무원이 떠난 후 오스트리아 청년과 폭풍대화에 돌입했다.  대체 어찌된 일인지, 보상은 해주는지.. 숙박은? ㅠ
아무것도 해결된 건 없지만 어찌됐건 통성명을 하고 서로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휴가를 바르셀로나에서 보내고 기찻길로 집으로 돌아가려던 후버트.  
오스트리아가 닭다리 뉘어놓은 것 처럼 생겼다면 서쪽의 얇은 뼈 부분.  산간지역이라 인구밀도가 낮고 교류가 적어 사투리가 심한 Dornbirn이라는 동네에 살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정말 알아듣기 힘든 희한한 말투로 독어를 하고 있었다.  견디다 못해 한마디 해줬다.

정말 너희 동네 억양 특이하구나...


으잉?  난 표준어(Hochdeutsch) 쓰고 있었어..


'오우;;;;'


엄청난 사투리로 들렸던 후버트의 말투가 사실은 나름 나를 배려해 준답시고 자신의 사투리를 엄청 완화시킨 나름 표준어였던 것이다. 
얼마 후에 후버트에게 전화가 와서 수화기 넘어로 대화하는 것을 들을 수 있었는데, 마치 영화에 나오는 외계인 언어를 미루어 짐작하듯이, 독일어 단어들의 단편들이 흩어져 들리는 희한한 말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정말, 다르구나;;;;ㅎㅎㅎ


알아들었어?  내가 뭐라고 했었는지?


뇌의 주름을 총동원해서 한두마디 해독해 봤더니, 재밌다며 박장대소한다.

이렇게 시간을 때우며 취리히까지 자정에 갔더니 모든 기차 올스톱.  다음기차는 무려 새벽 7시 -_- 

먹을수도 잘 수도 없는 애매한 시간 애매한 장소에 떨어진 우리들은 그저 하염없이 시내를 걸어다닐 수 밖에 없었다..  견디다 못해 새벽 두시에 야식을 사다가 호숫가에 앉아서 먹고, 새벽 5시에 아주 이른 아침을 먹으면서 알콜중독 스위스인들과 눈인사를 하고 겁에 질려 서둘러 나와 취리히 구석구석을 배회하며 어두운 가게들을 아이쇼핑하고 유적지를 기웃거리며 폭풍수다를 떨었으니...  

비포선라이즈가 따로 없었다.  

그러나...

머리로는 낭만적이라고 생각됐는데, 몸은 그저 피곤에 쩔어 낭만이고 나발이고 집에만 가고싶은 마음이 굴뚝같았고, 옆에 있는 후버트는 남자로 보이는게 아니라 독어회화로 나의 뇌를 폭파시키려고 하늘에서 내려온 악마같았다.  (실상은 취리히에서 국제미아로 전락할 뻔한 나를 구제해준 아주 고마운 친구였는데 말이다) 

토할 것 같은 우여곡절 끝에 각자 집으로 무사히 도착한 후 우린 근근히 소식을 주고받는 펜팔이 되었다. 난 석사를 마치고 박사과정을 준비하러 잠시 한국에 왔고, 후버트는 난데없이 스페인어 어학연수를 받겠다며 직장을 때려치우고 남미로 떠났다.  이 때가 2007년 초:

거의 소식이 끊긴지 1년이 넘어갈 무렵, 후버트에게 이멜이 왔다.

"잘 지내지?  (중략)
사실은 부탁하고 싶은게 있어서 연락했어.  내 베프가 몇달 후에 30번째 생일인데, 아주 특별한 선물을 해 주고 싶거든.  혹시 네가 내 친구를 위해서 짧은 소품을 작곡 해 줄 수 있을까 해서.. 그래서 그 악보를 친구한테 전달 해 주고싶어.  친구만을 위해 특별히 작곡된 곡을 선물하는거지.  내 친구중에 첼로하는 애가 있는데, 그애한테 연주를 맡길 까 생각중이야.  그러니까 첼로 솔로 곡을 써 줄 수 있겠니?
물론 작품료는 내가 내줄께 (어느정도로 할 건지 상의해보자) 그러니까 내가 너한테 위촉하는거지.
그럼 답장 기다릴께.  안녕!"


이렇게 하여 내 생에 첫 위촉곡이 탄생했다.  드디어 끝없이 갈고 닦은(?) 내 작곡내공을 상업적인(?) 용도로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나는 거만하게도 시간당 노동비를 20유로로 계산하고, 솔로 첼로곡 작곡에 필요한 시간을 대략 10시간으로 잡아서 무려 200유로를 불렀는데, 다행히도 후버트가 흔쾌히 받아들여서. 일을 성사시킬 수 있었다.  

친구의 이름 타마라(Tamara)의 철자를 응용해서 음이름으로 시(Ti) 미(mi) 라(ra) 를 응용한 첼로소품을 작곡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오글거리는 컨셉이지만, 타마라를 개인적으로 모르는 나는 음악적으로 그 친구만이 해당되는 곡을 만드는게 무엇일까 고민하다가 내놓은 나름의 해결책이었다. ㅋ


필사본을 보내기 전에 컴퓨터로 입력해 두었다 ㅋ(근데 지금보니 크레센도 표시가 다 날라가있네 아하핳)  ©J.S.Shin

 
곡을 부랴부랴 완성하고서 가장 빠른 우편으로 후버트에게 필사본을 보냈고, 후버트는 내 한국통장에 거금을 송금해주고 거래(?)가 완료되었다.
 
후버트의 투자로 자기만의 곡을 받게 된 그 친구는 참 복받은듯!  


이렇게 따뜻한 마음을 지닌 친구가 지구 어딘가에 있다는게 참 신기하다.  

지금은 공부를 더 하겠다며 석사과정을 밟고있는 후버트.  착한사람이 성공한다는 만인의 진리(?)를 널리 증명하길 바라며 응원하는 마음을 보내고 싶다.




오옷.. 내생애 첫 메인등록까지..!  이래저래 뜻깊은 글인듯!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