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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이야기/추억

나의 독일어 선생님


(깨알같은 자랑글이니 수족위축증이 걱정되시는 분은 뒤로가기 클릭할것)

때는 2003년 10월.
모짜르테움에서 첫 학기를 시작한 것과 동시에 독일어 수업을 알아보러 잘츠부르크 국립대학의 언어연구소를 찾아갔었다.  이미 전공수업으로 시간표는 꽉 차있었지만, 독일어 공부를 안한지 너무 오래돼서 바보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가서 이것저것 알아보다 보니 바로 지금 이순간, 내가 있는 이 건물의 2층에서 약 20분 전에 외국학생을 위한 독일어 반편성 시험이 시작되었던 것을 알게 되었다!  당황한 채로 무작정 시험장에 뛰쳐 들어갔더니, 굉장히 엄하게 생긴 시험감독님이 내게 오면서 늦었다고 한소리를 하셨다.  나름 사정을 설명했는데도 전혀 화를 풀지 않으셨고, 여기가 무슨 카페인줄 아냐고 매서운 눈초리로 설교하시더니 시험지를 던지다시피 하면서 주셨다.  쪼그라든 간을 붙잡고 모자라는 시간에 엄청난 집중력을 발휘하며 문제들을 풀고 나서 며칠 후, 결과를 보러 갔다가 내 이름을 중급(Mittelstufe) 2반 학생 명단에서 확인하였다.  생애 처음으로 초급단계(Grundstufe) 딱지를 떼는 감격스런 순간이었다… 게다가 중급 1반을 건너뛰고! (이런 깨알같은 사소한 일에 기쁨을 느끼던 시절이 있었다)

첫 수업날, 한 반에 60명도 넘는 학생들이 앉아있던 빽빽한 교실에 찾아갔더니 굉장히 착하게 생긴 남자선생님이 계셨다.  목소리도 그다지 크지도 않았는데, 학생들이 떠들지 않고 거의 다 집중을 하며 듣는, 상당히 효율적인 분위기의 수업이 진행되고 있었고, 선생님은 설명도 어찌나 명쾌한지, 내가 궁금해하고 가려워했던 독일어의 이상한 부분들을 차분하면서도 시원하게 설명을 해주셔서 듣고 있으면 절로 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같은 반 학생들은 반편성 시험이 무색하게 참 말도 잘했고 대답도 적극적으로 잘 했는데, 난 그 많은 학생들 사이에서 손을 들고 발표하기가 머쓱해서, 그저 조용히 숙제만 열심히 할 뿐이었다.  안타깝게도 1주일에 세번씩 하는 수업 중에 한번은 전공 수업과 겹쳐서 갈 수가 없었는데, 장소도 멀어서 어지간하면 포기할 만도 했던 수업을 남은 두시간이나마 눈비를 뚫고 참 악착같이 다녔던 것 같다.

바쁜 와중에 각종 숙제와 중간고사, 기말고사를 다 봤지만, 출석과 몇가지 과제가 모자라서 최고점수(1점)을 받을 수가 없었다고 선생님은 학기말에 약간 난감한 표정으로 말씀 해 주셨다.  난 어차피 학점이 필요한 것이 아니었고, 독일어를 많이 배울수 있어서 감사할 따름이었기 때문에 괜찮다고 말씀드렸고, 학기가 끝난 후 감사 이멜도 한통 보냈다.  

(이 한통의 메일이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잘 한 일이었는지…)

이후, 메일을 주고받으며 생각지도 않던 성적 이야기가 나왔다.  왜냐하면 난 1점과 2점 사이에 있는 애매한 위치에 있었고, 그 상황에서 선생님이 망설임 끝에 2점을 주면서 나에게 미안하게 생각해 왔던 것이었다.  난 어차피 학교에서 수업을 들으라고 한 적도 없었고 진짜 그냥 독일어를 배우고 싶어서 들었던 것이니 전혀 상관 없다고 했는데도, 전공수업을 그렇게 많이 들어가면서 독일어 수업까지 열심히 들으러 온것이 기특하다며 그럼 그냥 1점을 주겠다고 하시는것 아닌가?!  나야 그저 감사할 따름이었다. ㅎㅎ

그러던 와중에 전공 이야기도 나오고, 유학생활에 대한 수다도 떨다보니 한달동안 거의 매일 이멜을 주고받게 되었고, 다음학기가 시작될 무렵에는 이미 온갖 고민을 상담하는, 굉장히 친한 친구처럼 되어버렸다.  아쉽게도 다음학기에는 시간표 사정상 다른 분의 수업을 들어야 했지만, 선생님을 우연히라도 마주치면 서로 굉장히 반가워하며 얼마 안되는 바쁜 쉬는시간 내내 수다를 떨다 황급히 갈길을 가시곤 했다.  나는 나름대로 그렇게 많은 학생들 중에 유독 나랑만 친하신 것이 왠지 으쓱하기도 하고, 나에 대해 많은 것을 아시고 진심으로 안부를 궁금해 하며 이것저것 챙겨주시는 분이 잘쯔부르크에 계시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선생님은 워낙 착하기로 소문난 분이어서 모든 학생들이 좋아하는 분이었다.  수업이 시작된지 두어달이 지났을 때부터 학생들은 수업이 끝난 후 삼삼오오 모여서 선생님과 같이 사진을 찍으려 했고, 내 음악회 뒷풀이나 생일파티에 오셨을때는 다른 친구들이 더 반가워 하면서 대화를 하려고 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참 외롭고 어리둥절했던 유학생활의 초기에 이렇게 마음이 따뜻한 분과 알고 지내게 된 것은 큰 행운이었다.  돌이켜보면 철없는 푸념에 가까운 수준의 유치한 이메일을 썼을텐데 항상 자상하게 답장을 해 주시고, 그냥 쓰는 말이 아닌, 진심으로 응원하는 마음이 느껴지게끔 한데다 내 생각이 잘못된 방향으로 갈 때에는 조심스럽게 방향을 바로잡아 주시기도 했다.  이후에 내가 작품발표를 할 때면 청중으로 오셨다가 뒷풀이까지 와서 놀다 가셨고, 생일파티에 친구들과 다른 친한 선생님들을 초대했을 때도 꼭 한번씩 들렀다 가셨다.  

특히, 2006년 졸업연주를 위한 작곡발표회를 혼자 치룬 직후가 특별히 기억에 남는다.  진행이 미숙해서 상당히 늦게 끝났는데도 다 끝난 후 모든 사람과 인사를 마칠때까지 조용히 미소만 머금고 뒤에서 기다리시다가 내가 좀 한가해 졌을 때가 되어서야 나에게 오셔서 덕담을 쏟아부으셨다.  그 때의 수많은 칭찬들 중에 기억에 남는 것은, "너는 이제 진짜 작곡가(Du bist eine echte Komponistin)"라고 하셨던 것.  심지어 기존의 작곡가들이 쓴 현대음악 작품도 종종 듣곤 하지만, 내 음악이 더 좋았다고 하신 것이다.  이 때를 계기로 나 자신도 조용한 학생으로 머물지 말고 실제로 활동하는 활발한 작곡가로 자신에 대한 생각을 바꿔야 겠다고 결심하게 되었고, 마음이 위축되고 자신감이 부족할 때 지푸라기처럼 옛 칭찬들을 떠올리며 자신감을 불어넣고자 노력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졸업 직후, 잘쯔부르크를 떠나기 전 여름에는 선생님과 선생님 아내와 다같이 잘쯔캄머구트로 놀러가 호수에서 수영을 하기도 했고, 인근 동굴에도 산책을 갔다 왔다.  2008년 초에 전자음악실에서 작업을 하고 작품발표를 할 일이 있었을 때에도 만나서 회포를 풀었고, 매년 크리스마스 카드를 보냈고 서로의 생일 날에는 장문의 이멜이나 페이스북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그러다가 얼마전인 2012년 12월초, 잘쯔부르크를 잠깐 방문하면서 선생님과 사모님을 다시 뵈었다.  

그동안 글로 주고받았던 깨알같은 이야기들을 다 기억하시면서 어떻게 되었는지 그 이후를 물어보셨는데, 나 자신은 이미 잊은 일들까지 있어서 내가 당황할 정도였다.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하건 간에 항상 미소를 머금고 계신 선생님 부부는 항상 사랑의 기운을 내뿜고 계셔서 마치 치유를 받는 기분이었고, 오랫만에 독어로 이야기 하느라 버벅거리고 틀린표현을 밥먹듯이 하는 나와 대화하는 것이 어지간히 지루할 만 했는데도 계속 즐겁게 들어주셨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래도 난 마음 편하게 속깊은 이야기를 다 하지 못한 것 같아서 아쉬운 마음이 든다. 게다가 이번에 만나서는 사진도 안찍어서 기억을 되살릴 수 있는 사진이 없다는 것도 몹시 아쉽다.  다음에 뵐 때는 더 편한 마음으로 회포를 풀고, 독일어 표현이 세련되지 않은 것이 창피해서 진솔하게 속이야기를 하는 일을 주저하는 오류는 범하지 말아야겠다.

2005년 11월. 싸이월드 미니홈피에서 펌

증조 할아버지부터 4대째 같은 이름을 가진 한네스, 조상님들은 다들 직업이 Mauer(벽공)였지만 선생님만 독일어교사가 되셨다.. 둘째 아들이 베이스기타를 전공하고 비엔나에서 어렵게 음악활동을 하고 있다면서 내가 하는 활동에 더욱 관심을 가지시는 선생님의 아들은 사진으로만 봤지만 선생님 부부를 닮아서 그런지 참 표정이 따뜻했다.

중년의 모습이었던 10년전의 선생님은 이제는 머리카락이 완전히 은발로 변해있었다.  번개같이 흘러가는 시간을 잠시 붙잡고, 희미해져가는 기억들을 다시 살릴 수가 있어서 잘쯔부르크에서의 며칠은 한편으로는 참 기쁜 나날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