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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이야기/음악감상실

샤리노의 음악극 죽음의 꽃(Luci Mie Traditrici) 2014 통영 공연 리뷰



얼마 전에 통영국제음악제에 다녀왔습니다 ㅎㅎ

개막날인 토요일에는 통영페스티벌 오케스트라의 개막공연과 샤리노의 음악극, 두 개의 공연이 연달아 이루어질 예정이어서, 이 날 낮에 친구랑 통영에 가서 저녁을 먹고 공연을 보고 근처 저렴한 숙소에 묵고 오기로 했습니다. 가는 길에 김수현 기자님과도 연락이 되어 훈이시락국에서 만찬(?)을..ㅎㅎ

(훈이시락국, 분소식당. 사실은 식도락 여행이었음 ㅋ)


오늘은 두 공연 중 샤리노의 음악극에 대해서 이야기 해 보려 합니다.

한산신문 기사 - 샤리노의 음악극에 대한 정보를 자세히 알고 싶으신 분은 클릭하고 읽어주세요.


실존인물인 작곡가 제수알도(Carlo Gesualdo)의 비극적인 스토리(제수알도의 와이프가 바람을 피우자 사냥 나가는 척 해놓고 나갔다 와서 둘이 사랑을 나누는 현장을 급습하여 둘 다 살해 한 후, 처벌을 받기는 커녕 귀족의 신분을 이용하여 그들의 시체를 사람들이 보이는 곳에 매달아 뒀다고 함 - 이후 본인은 은둔생활을 하며 작곡에 전념했다고 함)를 바탕으로 한 "잔혹 치정극"이라는 이야기 정도만을 사전지식으로 듣고 대체 현대음악의 어법으로 어떻게 풀어나갔을지 호기심이 잔뜩 들었습니다. (실제로는 샤리노가 작업을 하던 도중, 알프레드 슈니트케가 같은 소재로 오페라를 쓰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Giacinto Andrea Cicognini의 연극 Il tradimento per l'onore 를 활용하고, 작곡가 Claude Le Jeune의 Elegy(슬픈 노래)를 차용하였다고 합니다. 


(Claude le Jeune의 Elegy)


음악도 멋졌지만 무대세팅과 연출이 감탄스러웠고, 공연장의 분위기와 어우러져서 비현실적이고 실험적인 공연의 현장이 효과적으로 탄생하였습니다. 특히 여주인공이 유체이탈(?) 되어 노래하는 사람(성악가)과 연기하는 사람(무용수)가 따로 있었던 것이 마음에 들었는데, 마지막 장면에서 유일하게 노래하는 사람이 무대 전면에서 연기를 하여 극적인 효과가 더해졌습니다. 

음악극의 전체적인 인상을 요약하자면 "극단적 절제"와 "고상한 압축"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감정이 격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감정을 완전히 배제하고 파편화된 선율을 시종일관 고집하며 다소 부자연스러운 억양의 노래가 두시간 가까이 지속되었는데, 그 고집스러움과 자제력이 참 대단하다고 느껴졌습니다. 


Lucia mie traditrici © Attilio Maranzano


극단적인 절제... 저도 참 좋아하는데요, ^^;; 자칫하면 게으름으로 오해받을 수 있어서 약간의 용기가 필요한 일인데, 두시간 가까이 진행되는 음악극 전체를 한가지 텍스쳐로 밀고 나간다는 것은 어지간한 베짱 아니고는 쉽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다소 불친절 해보이는 진행(음악적인 진행 자체가 실종에 가까웠습니다)에 거부감을 느끼는 일반인 관객의 긴 한숨과 뒤척거림이 느껴지긴 했지만, 어찌됐건 물에 술탄듯 술에 물탄듯 멜로드라마적인 진행을 하지 않고 마치 현미경으로 한가지 성분만을 연구하듯이 치열하게 섬세하고 세밀한 작업에 들어간 것은 인상이 깊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극단적인 절제와 미니멀리즘(여기선 특정 사조의 의미가 아님)의 결과로 마지막 장면에서 부부사이인 두 주인공이 노래를 멈추고 대화체로 서로를 대할 때 약간의 감정이 드러나는 것이 상대적으로 감정의 폭발에 가까운 서스펜스를 낳게 됩니다. 이 장면에서 남편은 이미 아내의 애인을 살해 한 후였고, 아내는 자신이 살해당할 것을 직감한 상태인데, 이 때의 속삭임과 고함은 관객이 마치 폭력가정의 집 안방에 본의아니게 초대되어 불편하고 무섭지만 나갈 수 없는 난처한 입장에 처한, 공포에 질려있는 손님이 된 것과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한국 드라마에도 더 심한 고함소리와 싸우는 장면이 참 많은데, 왜 이런 임팩트가 없을까요? ㅎㅎ

드라마에서 부자연스럽고 경직된 억양으로 이야기 하다가 마지막에서만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어떨까 생각을 해보다가 저 혼자 피식 웃었습니다. 아마도 모두 채널을 돌렸을테니까요 ㅎㅎ 어쩌면 "죽음의 꽃"과 같은 진행은 관객이 객석을 떠날 수 없는 환경에 놓였을 때만 가능한 전개방식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여기서 저는 좀 엉뚱하지만 영화 어바웃 슈미트를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잭 니콜슨의 열연이 돋보였던 영화인데, 평범한 미국 직장인이자 남편인 슈미트씨가 은퇴하고 아내와 사별하고 딸이 결혼하는 와중에 여러가지 사건들을 겪는데, 무기력함 때문에 분노를 제대로 표출하지 못하고 항상 마지막에 긴 한숨을 내쉽니다. 그리고 조용히 혼자 울거나 우울감에 빠지기도 하는데, 이런 무력감을 영화 내내 벗어나지 못하는 듯 하다가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크게 울음을 터트리는데, 이것이 이전까지의 주인공의 모습과 대조되어 거의 충격적이기까지 했던 기억이 났습니다.  

이렇게 절제 이후의 표출은 그 절대적인 강도가 크지 않더라도 상대적으로 큰 변화이기 때문에 임팩트가 클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예는 무수히 많을텐데, 문득 이 영화가 생각났던 이유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ㅎㅎ


어찌됐건  "죽음의 꽃"에서도 마지막 장면에서만 실제로 감정이 드러남으로 인해 극단적인 상황의 연출이 작은 변화임에도 불구하고 효과적으로 나타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음악극 중간에 삽입된 Claude de Jeune의 Elegy를 인용한 부분에 대한 언급을 안할 수가 없습니다. 처음에는 원곡과 거의 같은 형태로(물론 편성은 다르고 노래도 없지만) 인용되어 음악극 진행의 무미건조함과 대조되는 인터메조와 같은 역할을 했었는데, 이것이 갈수록 음역이 높아지고 텍스쳐가 파편화 되어 마치 한밤중에 해골바가지가 바람에 살포시 흔들리는 것 과 같은 기괴한 분위기를 연출하며 주인공의 피폐한 감정을 대변하는 듯하여 오싹하면서도, 그 역시 절제와 집착(?)으로 인해 이루어진 효과라는 것에 감탄을 안할 수가 없었습니다. 극단적인 절제와 높은 음역대, 풍자적인 묘사와 기괴함, 모두 제가 굉장히 좋아하는 아이템들이라 계속 희열을 만끽해가며 감상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샤리노가 내가 원한 걸 이미 해버렸다는 것이 살짝 아쉽기도 한 밤이었습니다^^ 



통영음악당 콘서트홀. 음악극은 맡은편 "블랙박스"에서 열렸다. 

샤리노(오른쪽)과 티그란 만수리안(왼)




1박2일의 짧은 시간동안 통영을 방문하려니 콜택시가 필수였습니다. 참고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