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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이야기/작곡에 대한 단상

베네치아를 떠나며.. 슈테판의 고민



2012년 11월 30일: 베네치아를 떠난 날…
아틀리에 플레인 베니스(링크)에서의 2주반의 기간은 잔잔한 듯 하면서도 다이나믹하기도 한, 일상과 여행이 공존하는 나날들이었다.  떠나오기 직전에서야 레지던시 운영을 하느라 고생중인 율마와 수를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 진심으로 마음속 깊이 우러나오기 시작했는데, 그 뒤늦은 타이밍 때문에 굉장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Say goodbye에 참 익숙치 않은 나를 안아주는 Su를 견뎌낸(?) 후 머쓱하게 인사를 하고 황망히 뒤돌아 나와 다음 행선지인 오스트리아 행에 온 신경을 집중하기 시작하였다. 

몇달 전부터 싼 값에 예약했던 잘쯔부르크 행 기차표를 자세히 보니 베네치아에서 버스를 타고 오스트리아에 들어가서 기차를 갈아 타는 여정이었다.

여유있게 나와서 버스터미널이 있는 트론케토(Tronchetto)역에 일찍 도착하려고 집에서 일찌감치 나왔는데, 아쿠아 알타 때문에 대운하의 수면이 상승해서 바포레토 노선들이 엉망이 되어있었다.  베네치아를 가로지르지 않고 그 주변의 넓은 바다로 돌아가는 바포레토를 탔지만, 다행히 워낙에 일찍 나온 탓에 버스시간에 늦지는 않은 듯 하였으나, 표에 적힌 버스 출발 시간을 잘못 읽은 나의 어이없는 실수로 인해 커피숍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오스트리아 행 버스를 놓치고 말았다.. 이로서 오랫동안 그려오던 나의 치밀한 시나리오는 산산조각이 나고, 나는 두시간을 기다린 후 다음 버스 운전기사가 유두리를 발휘하기를 바라는 애매한 상황에 놓이고 말았다.  여행을 많이 해봤지만, 10년전 베낭여행을 제외하면 다 아무리 늦어도 몇주 전에는 동선을 정하곤 했는데, 도시간 이동이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것은 개인적으로 너무 큰 스트레스이다... 하지만 누굴 탓하리오… 정말 20대까지는 하지 않던 말도 안되는 실수들을 최근에는 남발하는 것 같다.  수학을 정말 잘하는데 산수를 틀려서 답을 못 맟추는 기분.. 나이가 들 수록 심해지려나? ㅠ

베네치아에 놀러온 수연이를 더이상 시간낭비 하게 할 수는 없어서 시내로 가는 바포레토를 태워 보내고 난 같이 커피를 마셨던 그 샵으로 다시 들어가서 물 한병을 사고 자리에 앉았다.  웨이터가 와서 자릿세 50센트를 받아간 후, 커피숍에서 기다리고 있는 와중에 7-8명의 오스트리아 젊은이들이 우르르 들어와서 자기들끼리 대화를 하고 있는데, 묘하게 나의 잘쯔부르크 유학시절의 마음이 데자뷰처럼 재연되고 있다.  바깥의 회색빛 날씨와 함께…

독일어 대화 내용이 잘 들리는 지금 나의 마음이 반갑지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내가 그들의 언어를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을 감추고 싶어진다.
자존감이 부족한 것일까?
어차피 그들과 나는 이방인이고 정신적인 교류가 수월하지 않을 것이라는 자조섞인 센치함인 것일까?  
독일어를 할 줄은 알지만, 아주 어려운 이야기는 이해할 수 없는 나의 상황이 싫은 것일까?  깊이있는 대화를 결국엔 하지 못한 것만 같은 찝찝함과 아쉬움인가?

결국 두시간이 넘어도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다가 시간표를 다시 한번 잘못 읽었다는 것을 알게되었고, 화가 머리끝까지 난 상태로 기차역으로 갔다가 거기서도 뾰족한 수가 없어서 되돌아왔다.  참고로 트론케토 버스터미널에서 로마 광장까지 가는 1유로짜리 모노레일이 있으므로 여기선 편도 7유로짜리 바포레토를 타지 않아도 된다.  굉장히 다행이다.

계획보다 네시간이나 늦은 세시 반에 결국 버스를 타고 오스트리아의 Villach에 내려서 기차로 갈아타는 바람에 잘쯔부르크에는 계획보다 무려 6시간 늦은 밤늦게 도착했다.  고맙게도 유학당시 작곡과 동기였던 슈테판이 마중나와줬고, 새로 지은 기차역을 제외하고는 변한 것이 거의 없는 잘쯔부르크 중심부를 잠깐 산책하고 한잔을 걸치며 회포를 풀었다.  


현대음악에 회의를 느끼고 자신의 진정한 음악적 정서는 후기낭만 스타일에 있는 것 같아서 작곡을 과연 계속 해야 할지 고민이라는 슈테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오케스트라 곡을 작곡중이라고 했다. 곡의 주제는 우크라이나의 대학살을 고발하는 내용인데, 정치적인 작품인 것을 활용하여 연주를 위한 지원사업을 알아보다가 유네스코에 프로젝트에 대한 소개를 하게 되고, 몇년 후, 파리의 유네스코 헤드쿼터에서 자체행사의 일원으로 초연될 예정이라고 한다.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고 싶어하는 슈테판다웠고, 한편 오스트리아라는 선진국이자 중립국인 나라에 태어났기 때문에 이렇게 자유롭게 남의 나라의 일에 진심으로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슈테판이 조금은 부럽기도 했다.  당장 한국만 생각해도 머리가 복잡한 나에게는 우크라이나의 학살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듣는 것은 조금은 뇌에 과부하가 걸리는 일이었다.  

슈테판은 나의 이런 심정은 모른채, 이세상에는 홀로코스트 말고도 끔찍한 일이 너무 많은데 사람들은 그걸 잘 모른다면서 모든 숨겨진 정치범죄는 끝까지 추적하고 파헤쳐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두말하면 잔소리지.. 한국만 해도 어디 파헤칠게 한두가지인가? 한국에 대해서도 이야기 하려다 내 입만 아플거 같아서 관뒀다.  슈테판 이야기는 이게 다가 아니지만, 일단 여기까지만 써야 할 듯..


update(20131024): 슈테판의 교향곡 관련 기사(영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