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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이야기/음악감상실

5시간짜리 피아노곡? 마라톤 연주가 필요한 현대 피아노음악


100미터 달리기에서 불가능 할 거 같았던 '마의 10초'가 1960년대에 허망하게 깨진 이후로 육상의 역사는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9초대의 기록을 우후죽순처럼 쏟아냈습니다.  개인적으로 몹시 좋아하는 기계체조 선수들 또한 인간이 도저히 할 수 없을 것 같은 동작들을 훌륭히 수행해 나갑니다.  양학선의 신기술은 몇년이 지나면 다른 선수들도 수행할 것입니다.  16년전에는 여홍철만 가능했던 "여투"기술처럼..

인간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단지 고정관념에서 비롯된 존재하지 않는 한계일 뿐인가요?


리스트가 30분이 넘는 피아노 소나타를 작곡했을때만 해도 당시 피아니스트들은 너무 길고 어려워서 칠 수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10대 청소년들의 레퍼토리가 되다시피 한 곡입니다.  그렇다면 현대음악에서 '갓 작곡된' 피아노곡들 중 가장 긴 곡들은 어떤게 있을까요?

일단, 14시간 가까이 걸리는 에릭 사티(Eric Satie)의 벡사시옹(Vexation)이 있습니다.  이는 단 한페이지뿐인 악보를 반복하면서 가능 한 일인데, 개인적으로 작곡가 강석희 교수님의 지시하에(?) 선배님들과 돌아가면서 짧은 버젼으로 연주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Eric Satie의 벡사시옹(Vexation) 중 일부


그렇다면 반복표시 없이 죄다 풀어 쓴(?) 곡으로서 가장 긴 축에 속하는 곡은 무엇이 있을까요?

Opus Clavicembalisticum 악보(발췌)


카이코스루 소랍지(Kaikhosru Shapurji Sorabji)라는 영국 작곡가는 Opus Clavicembalisticum(오푸스 클라비쳄발리스티쿰)이라는 피아노 모음곡을 쓴 바가 있는데, 이는 장장 4시간에 걸쳐서 연주되는 곡입니다.  물론 일부만 연주하는 것도 가능하지만, 한데 어울러서 한꺼번에 연주하도록 작곡된 모음곡이기 때문에 4시간짜리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 장대한 길이와 어울리는 곡 제목입니다.  "오푸스클라비쳄발리스티쿰..." 발음해보다가 입에서 불날뻔;;;


(비디오가 비공개 되었습니다! ㅠ 복구예정)

Sorabji의 Opus Clavicembalisticum 중 Pars Tertia (피아노: John Ogdon)


소랍지는 매우 내성적이고 예민한데다 소심(?)하기까지 한 작곡가였던 관계로, 자신의 곡이 잘못 연주되는 데에 대한 거부반응이 몹시 강했습니다.  자신의 곡이 개떡같이(?) 연주된 어느날, 그는 너무나도 상심한 나머지 자신의 작품이 공개적으로 연주되는것을 금지시켰다는 전설이 내려져옵니다.  (이는 후대에 좀 더 과장되어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이고, 사실상 법적으로 금지하지는 않았으면 단지 개인적인 바램을 피력했을 뿐이라고 합니다.  어찌됐건 자신의 곡이 연주되지 않기를 바랬다는 점에서 어지간한 작곡가와는 생각구조가 매우 달랐음이 분명하네요! +_+)  당대에는 "연주가 불가능한 곡"이라고 악명이 높았으나, 어찌됐건 아무도 치지않는 소랍지의 피아노 곡들은 음악계에서 잊혀져갔고, 소랍지 본인은 혼자 곡만 쓰고 작품활동을 일절 안하면서 런던 (후에는 South Dorset)에서 조용히 지냈습니다.  이 때 작곡한 100개(!!!)의 초절기교 연습곡들 역시 먼 훗날에 세상에 알려지게 됩니다. 


(저작권문제로 사용중지 ㅠ 다른 출처로 찾아서 복구하겠습니다)

Fredrik Ullen이 연주하는 Sorabji의 Transcendental Etude No. 1


무려 40년이 지난 후, 피아니스트 욘티 솔로몬(Yonty Solomon)이 소랍지의 피아노곡을 발굴하여 연주를 하였고, 이를 계기로 한층 발전된 피아노 연주기술을 보유한 연주자들이 소랍지의 곡들을 작곡가 본인 마음에도 드는 수준으로 연주할 수 있게 되어서 현재는 음반도 여러장 발매가 된 상태입니다.


소랍지의 Opus Clavicembalisticum보다 더 연주시간이 긴 피아노 곡으로는 또다른 영국 작곡가 마이클 피니시(Michael Finnissy)의 소리로 된 사진의 역사(The History of Photography in Sound)가 있는데 이 연주시간이 5시간 반이나 되는 모음곡입니다.

사진의 역사를 소리로 담는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는 컨셉이고, 음악을 듣는다고 해서 더 잘 이해가 가지는 않습니다...;; Finnissy의 음악은 대체로 청중을 고려하면서 재미있는 진행을 하려는 배려를 일절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Etched Bright With Sunlight을 들으며 강렬한 햇빛을 바라보는 눈의 통증을 떠올려 본다면 약간의 상상을 할 수 있는 정도?



Finnissy의 작품을 가장 잘 소화하는 피아니스트로는 Ian Pace와 Nicolas Hodges가 있습니다.  하지만, 머지 않은 미래에 더 많은 연주자들이 능숙하게 '사진의 역사'를 소리로 표현하는 날이 올것이라는 확신이 드는건 필자가 Finnissy 선생님의 제자였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