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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이야기/추억

옛 선생님의 편지


옛 선생님에게 크리스마스 카드를 보냈다가 답장으로 딸이 만들었다며 보내주신 카드를 받았다. ㅎㅎ



보내주신 분은 나의 지도교수님 프란츠 짜운쉬름(Prof. Franz Zaunschirm)!
 

(사실... 저기에 있는 Prof. Zaunschirm은 오스트리아식 표현으로는 틀린 표기이다.  왜냐하면, 앞에 Prof같은 호칭을 붙일 때, 그 사람이 살아오면서 달게 되는 모든 경력을 순서대로 다 나열해야 하기 때문이다.  

-일단 박사학위를 땄으면 Dr. 
-석박통합이 아니고, 따로 석사학위를 받았다면 Mag.  (마기스터의 줄인말. 석사학위만 있는 사람도 Mag.라는 존칭이 붙는다)
-교수니까 Prof.
-그런데 대학 교수이므로 Univ.Prof.
-계약직이나 외부 전임강사가 아닌 정교수일 경우 O.Univ.Prof. (O.는 ordentlich의 약자)

그러므로 나의 옛 스승님의 정식 명칭은 무려
O. Univ. Prof. Mag. Dr. Franz Zaunschirm
 되시겠다;


근데 이걸 왜 설명했지?ㅠ  그럼 서둘러서 삼천포로 흘러간걸 물꼬를 돌려서...)


학부때까진 작곡만 주구장창 파다가 유학나와서 석사과정을 밟을땐 음악이론(Musiktheorie)전공도 병행했었다.  (그래봤자 겹치는 과목이 엄청 많긴 했지만 말이다..) 
 

그리하여, 강의법 등 교육내용과 작곡이론 및 음악학을 짬뽕시킨 전공인 무직테오리를 작곡전공과 동시에 밟을때 나를 가장 자상하게 도와주신 짜운쉬름 선생님 이야기를 하려 한다.

선생님을 처음 뵈었을 때, 딱 전형적인 오스트리아 아저씨를 떠올렸을 때의 이미지였다.
 

당장 비엔나 왈츠라도 추실 것 같은 말끔한 정장차림에 매일 바뀌는 형형색색 나비 넥타이와 한결같은 콧수염까지.. 내가 나름 갈고 닦았던 독일어회화가 모두 일시정지 할 것만 같은 교과서적인 차림새를 하고 계셨다.  게다가 좀처럼 변하지 않는 (약간 화난 듯한..이라고 오해했던) 무표정한 얼굴.  아주 웃기고 재미있는 일이 있을 때는 살짝 눈만 반짝이시는 듯 할 뿐 시종일관 변하지 않는 표정...  질문이라도 하면 엄청나게 빠른 말투로 이것저것 설명 해 주시는데, 많은 정보를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선생님의 무표정한 얼굴과 오스트리아 억양에 적응하지 못한 나는 대략 패닉상태로 고개만 끄덕거릴 뿐이었다.

유학 떠나기 전에 잠시 들었던 유학대비 독일어 수업에서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유학생들 하는걸 보면 폭포와 같이 쏟아지는 양질의 정보를 큰 대야로 받아도 모자랄 판에 겨우 숟가락 하나로 허겁지겁 받으러 다니는 형상이라는.. 


(언어의 장벽과 그것을 깨야만 하는 이유를 참 찰지게 비유하셨던 그때의 강사님은 오르간 전공으로 10년을 유학하셨던 분이었다.)

이런 저런 들은 이야기도 있고 하니 부끄러운 모습으로 남지 않기 위해 두려움을 무릅쓰고 열심히 수업을 듣고 이것저것 이해하건 말건 물어보고 했다.  '선생님이 화나신게 아닐게야!  분명히 내가 한 헛소리들은 신경 쓰시지도 않을 것이야!'라고 자기최면을 애써 남발하며...

총 3년의 오스트리아 유학시절 중 첫 2년은 인근 대학에서 독일어 수업을 받으러 다녔다.  그 사실을 안 짜운쉬름 선생님은 지나가다 나의 독일어 교재를 보고 의아해 하면서 물어보셨다.  이제 전공공부 하느라 바쁠텐데 왠 독일어 수업?

그 때 난 강박증 비슷하게, 계속 어학 수업을 들어야만 한다는 집착때문에 작곡공부와는 별개로 덤으로 수업을 다니고 있었지만, 사실 엄연히 다니던 대학을 두고 다른 곳에 가서 전공과 관계없는 어학수업을 듣는 일이 그닥 효율적이진 않았기 때문에 선생님이 어떻게 생각 하실지 알 수가 없었다.  그냥 이렇게 대답했었다:
계속 배우지 않으면 까먹으니까요;;


선생님은 인상이 깊으셨는지 눈이 약간 커지시면서 (aber 표정은 그대로)
마치 수영할때 가만있으면 가라앉으니까 계속 팔다리를 움직여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란 말이지?
라고 하시곤 홀연히 복도에서 사라지셨다. 


.....(저거 칭찬인긔?  이미 떠나셨으니 여쭤볼 수 없음 ㅠ)

세월이 제법 지나 선생님의 진심은 그 무표정한 콧수염 너머에 따뜻한 마음에 있다는 걸 점차 깨닫게 되고, 선생님도 나를 낮설게 여기지 않으시고 먼저 챙겨주기 시작하셨다.  

유학시절 급성 맹장염으로 입원을 한 적도 있었는데, 그 때 주치의(Hausarzt)시스템에 대해 처음으로 뼈저리게 체험하고 뒤늦게 주치의를 구하느라 아픈 몸 이끌고 방황할 때, 어떻게 알아내셨는지 먼저 내가 사는 집으로 전화하셔서 안부를 물어보시고 수소문 끝에 적절한 의사를 찾아서 예약도 도와주시기도 하였다.  

사실 맹장염이 시작은 급성이었는데 수술 후유증이 심하고 의지할 주치의조차 없어서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었다.   아프고 무기력해져서 비행기타고 한국에 갈 힘조차 없이 늘어져 있을 때 이렇게 선생님께서 챙겨주시니 감사하면서 정신이 번쩍 들기도 했었다.  '그래, 더이상 이렇게 아프다고 넋놓고 있는다는건 부모님과 선생님에 대한 예의가 아니야!' 라고..다짐하면서 열심히 관리를 하고 애써 학교에 다시 나갔었고, 쓰다 만 곡을 열심히 완성해서 다음학기에 연주시킬 수 있었다. 


입학 하자마자 우연찮게 봤던 어느 작곡과 학생의 졸업연주를 가볼 일이 있었는데, 이 친구는 자기 혼자 음악회 전체 프로그램을 기획하면서 제대로 된 하나의 콘서트를 만들어 나갔었다.  그때 순진했던 나는 당연히 모든 작곡전공 석사 졸업연주 이런 식인 줄 알고 미리부터 치밀하게 준비 해 나가 1시간 반 분량의 음악회를 기획하고 한 곡은 지휘까지 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꼭 혼자 할 필요는 없었고 한사람당 30분 이상 분량만 발표하면 되는 것이었는데, 이건 또 무슨 집착인지, 나도 꼭 그 때 처음봤던 그 음악회만큼 하고 싶어서 극구 추진했었다.

이런 과정을 보신 선생님은 퍽 감명이 깊으신 듯 했다.  나중에 만난 필자의 부모님에게 까지 그 때 음악회 이야기를 하시면서 칭찬을 펼치신 것으로 봐서 말이다.  

나중에는 성공의 조건에 대한 이야기를 하시면서, 전공분야만 열심히 파고드는게 성공의 충분조건이 아닌 이유에 대한 체계적인 가르침이 있으셨는데, 지금 생각하면 당연한듯한 내용이 당시에 그저 공부밖에 할줄 아는게 없었던 필자같은 사람에겐 꽤 큰 도움이 되는 이야기 들이었다.  이런식으로 선생님은 학생 하나하나에게 필요한 것 위주로 가르치셨고, 당신의 경험담을 아낌없이 나누는 자상한 분이었다.

여차저차 해서 무사히 졸업을 할 수 있었고, 졸업 무렵에는 필자를 적극적으로 도와주시는 든든한 멘토가 되신 선생님은 너같은 애를 이대로 졸업하게 할 수는 없다며 모짜르테움 재단에서 매년 젊은 음악인 한명에게 수여하는 메달을 받도록 하겠다며 재단측에 적극 추천을 하신 결과 나는 파움가르트너 메달(Bernhard-Paumbartner Medal)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ㅠ  덕분에 부모님이 처음으로 잘쯔부르크를 방문하셨을 때 뜻깊은 추억거리를 남겨드릴 수 있게 되었고 그래서 더 감사하는 마음이 컸다. 


졸업식 다음날 메달을 받았다.  시상식때 찍은 사진
왼쪽이 짜운쉬름 선생님이다.
(오른쪽은 선생님 못지않게 무표정의 대가인 당시 모짜르테움 대학 총장 
존칭은 어마어마하게 길고 복잡할테니 생략 ㅠ)

메달사진 투척~! 
(자랑 맞음)  

선생님과의 긴 인연은 졸업 이후에 선생님이 잠시 한국을 방문하면서도 이어졌지만, 글이 길어진 만큼 다음기회에 이야기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매년 연말이 되면 유럽 사람들 하는거 따라서 옛 친구들과 선생님에게 크리스마스 카드를 보내곤 하는데, 매번 이렇게 답장을 해주시는 선생님 덕분에 옛 생각도 하면서 더 힘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